세월호 유가족들의 정의와 진실규명을 위한 여정은 수십 년이 걸릴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수년 전, 영국에서 일어났던 비슷한 참사가 이를 말해준다.

힐스버러 참사는 1989년, 한 축구 경기장에 인파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96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사고이다. 희생자들은 대부분 청소년이었다. 리버풀 경기를 보러 온 수많은 사람들은 준결승전까지 경기를 관람한 후 인파가 넘쳐나면서 질식을 하거나 압사를 당하고 말았다. 경찰이 안전 수칙을 무시한 채 한 구역 안으로 지나치게 많은 사람들을 입장시킨 것이 원인이었다.

세월호 참사 사건 처리 과정의 많은 부분이 힐스버러 사건과 닮아 있다. 두 참사 모두 유가족들의 진실규명을 위한 싸움이 사건의 쟁점으로 떠올랐다는 공통점이 있다. 또한, 두 사건 모두 법적 공방이 진행되고 있는 상태이다. 힐스버러 유가족들의 오랜 투쟁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진실규명 특별법을 위한 싸움이 얼마나 길게 이어질지 암시해 주고 있다. 한국의 여야가 최근 합의하여 세월호법을 통과시켰지만 가족들의 반대로 결국 무산이 되고 말았다. 유가족들은 정부로부터 독립된 기관에 조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할 수 있는 더 강력한 특별법을 요구하고 있다.

세월호 참사로 아들 김동혁군을 잃은 어머니 김성실씨는 “더 이상 정부를 믿을 수가 없다”며 이제는 남아있는 가족과 심지어는 자신의 안전까지도 장담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전문성이 있는 사람들에게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하여 철저하게 조사를 하고 책임자 처벌까지 하기 위해서는 특별법이 꼭 필요하다”고 말했다.

개인들에 대한 범죄 기소는 이미 진행 중이다. 선장과 총 세 명의 선원이 과실치사와 업무 태만 혐의로 곧 법정에 설 예정이다. 하지만 이들에 대한 재판이 공정하게 치러질지, 또 이들이 받은 안전 훈련과 같은 사안들이 구체적으로 밝혀질지는 의문이다.

43명의 관료와10명의 한국해운조합 안전 관련자들 또한 각종 비리와 사기 혐의로 곧 법정에 설 예정이다. 하지만 유가족들이 요구하는 것은 최고 권력자들의 처벌이다.

유가족들의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는 원재민 변호사는 “이 사건이 단순한 실무자 차원에서의 사건이 아니라 국가 전체적으로 컨트롤타워가 없어서 제대로 구조가 되지 않아 생긴 사건” 이라며 “컨트롤타워라는 것은 밑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청와대를 비롯해서 권력층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한 “그런 부분들이 잘 밝혀져야지 다시는 이런 일이 안 일어나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힐스버러의 유가족들 또한 참사 이후 고위 관료들과 비상대책위원회의 책임 규명에 실패를 하는 등 비슷한 싸움을 이어가야만 했다.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을 이들은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기다리고 있다. 참사 발생 후 1년이 지나 로드 테일러(Lord Taylor)에 의해 처음으로 이뤄졌던 수사는 경찰과 경기장 관리자들을 도마에 올렸지만 초등 대등 인력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못했다. 증거들에 대한 수사가 끝난 후에도 관료들은 처벌을 받지 않았다.

유가족들을 더욱 힘들게 한 것은 기나긴 법정 공방 끝에 나온 1991년도 판결문이었다. 희생자들이 구조대가 도착하기 전 이미 사망하였기 때문에 ‘사고사’에 불과하다고 밝힌 것이다.

2012년이 되어서야 두 지역의 경찰대가 사건의 진실을 가리기 위해 목격자들의 증언을 무시하고 변질시키는 등의 음모를 저질렀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애초부터 정부와 경찰 그리고 일부 언론사들이 진실을 가리고 책임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손을 잡았던 것이다. 8,551일이나 지나서야 이러한 정황이 밝혀지면서 마침내 본격적인 조사가 시작될 수 있게 되었다.

1989년,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날, 영국의 한 신문은 참사의 책임을 엉뚱한 곳에다가 묻는 조작된 기사를 내보냈다.

1989년,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난 다음 날, 영국의 한 신문은 참사의 책임을 엉뚱한 곳에다가 묻는 조작된 기사를 내보냈다.

두 참사는 모두 수 차례 발령된 안전 경보에도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아 발생한 인재이다. 이 사실은 유가족들의 분노를 더욱 키웠다. 힐스버러의 안전 증서는 1980년대에 이미 법을 위반한 상태였다. 수 차례 경고를 받았지만 참사가 일어나기 몇 주전에는 경험이 없는 경찰이 경기장 안전을 책임지도록 배치를 받기도 했다.

경찰은 또한 급격하게 악화되어 가는 상황을 무시했다. 명백히 작아 보이는 공간 안에 사람들을 계속 입장시킨 것이다. 관중 속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여러 각도로 설치되었던 카메라 화면을 보면서도 컨트롤 타워는 아무런 대응을 하지 않았다. 경기가 중단되고 부상을 당한 이들이 경기장을 덮쳤을 때 역시도 대응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응급차는 고작 세대만 도착했고 팬들이 부상자들을 직접 치료하는 웃지 못할 상황이 벌어졌다. 2012년 보고서는 당시 사망한 인원의 절반은 살 수도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책임자들 역시 과도한 양의 화물을 배에 싣는 등 안전 수칙을 반복적으로 어겼다. 참사가 일어난 날 배에는 안전 규정에 명시된 무게의 3배가 넘는 무거운 화물이 실려있었다. 선원들과 선장은 안전 규칙을 따르지 않았고 혼자 배를 탈출하는 사이 희생자들은 배 안에 방치되었다. 참사에 대한 초등 대응 또한 비난을 받았다. 현장에 도착한 초등 대응 인력은 신속하게 움직이지 못했고 잘못된 정보를 전달했다. 힐스버러 때와 같이 많은 희생자들이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해야만 했다.

두 나라의 언론 또한 대중의 큰 질타를 받았다. 특히 영국의 한 신문사인 ‘더 썬’은 리버풀 팬들이 당시 ‘짐승과 같이 행동했다’고 보도하는 악명 높은 기사를 쓰기도 했다. 기사 속에는 “부하 직원들이 팬들로부터 공격을 당하는 등 지옥을 맛보았다”는 내용의 경찰 대원의 인용 문구가 등장한다. 그러나 이는 거짓 증언으로 드러났고 기자들은 거짓된 정보임에도 안일하게 기사를 내보낸 것으로 밝혀졌다.

한국의 언론 또한 부정확한 보도로 큰 질타를 받았다. 결국 다수의 메이저 언론사들은 대중들에게 공개적으로 사과를 해야만 했다. KBS의 한 기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진도 방문과 관련해 연출된 보드를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언론의 신뢰도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세월호 유가족들의 가장 큰 걱정은 참사 이후 어떠한 변화나 개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족들을 변호하고 있는 원 변호사는 유가족들이 너무도 끔찍한 일을 겪었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 바라고 있다”며 철저한 진상규명을 통해 “확실한 재발 방지 대책을 세워 이 나라가 정말 안전한 나라가 되기를 바라고 있다”고 말했다.

비록 대통령이 해경을 해체시키고 국가안보사무소를 새로 만드는 계획을 세우고는 있지만 이 외의 더 구체적인 방안은 논의되고 있지 않다. 해운 기업들의 지원으로 운영되는 한국해운조합은 여전히 선박 안전 감사 총괄을 맡고 있는 실정이다.

힐스버러의 비극은 하나의 참사가 어떻게 변화를 이끌어내는지 보여주기도 한다. 힐스버러는 영국의 스포츠 행사들의 안전 문화를 송두리째 바꿔놓았다. 초창기에 행해졌던 로드 테일러 조사는 영국 전역에 있는 경기장들에 대한 디자인 개혁을 요구했었다. 이는 축구협회에 의해 곧바로 채택이 되었고 정부의 도움으로 실현이 될 수가 있었다.

힐스버러 참사가 일어나고 5년만인 1994년, 경기장 설계와 안전에 관한 주요 개혁들이 추진되었다. 당시 도입된 정책들 중 하나는 관람객 한 명당 하나의 좌석을 제공하는 정책이었다. 정부는 모든 개혁 예산의 3분의 1에 달하는 266백만 달러를 지원했다. 전국의 경기장들 중 3분의 1이 재건축을 시행했다. 나머지 경기장들은 안전하지 않은 구간들을 골라 보완을 하는 방식으로 안전성을 높였다. 참사 이후 이어진 이와 같은 노력은 스포츠 행사 안정성에 있어 영국의 순위를 한층 높은 놓았다.

세월호와 힐스버러, 두 참사는 국민들의 애국심에 큰 상처를 남겨놓았다. 2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힐스버러라는 이름은 참사를 기억하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 회고되고 있다. 최근, 영국 총리 데이비드 캐머론은 “정의를 위해 오랜 시간 싸워온 힐스버러 유가족들과 이들의 지지자들의 강인함과 존엄성에 깊은 경의를 표하는데 동참해 달라” 며 사죄의 말을 전하기도 했다.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의 정의실현이 힐스버러 참사 만큼이나 길게 이어지지 않기를 많은 이들은 바라고 있다.